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농구여왕' 박신자, 전설의 존재 이유를 확인시키다
    카테고리 없음 2015. 7. 7. 11:31
    반응형

    스포츠에 관한 기사와 칼럼을 쓰는 사람으로서 소위 전설로 불리는 만나는 일은 단순히 취재원 한 명을 만나는 일이 아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사건과 같은 일이다.

     

    어린 시절 작은 흑백TV 속에서나 보던, 그것도 아니라면 교과서 같은 곳에서 낡은 흑백사진으로나 접해봤던 스포츠 스타를 직접 눈 앞에 두고 인터뷰를 하고 그에 대한 기사 또는 칼럼을 쓰는 일은 그야말로 스포츠 기자로서 특권과도 같은 일이다.

     

    지난 6일 속초에서 개막한 여자프로농구 2015 우리은행 박신자컵 서머리그 개막식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한국 여자농구의 전설 박신자 씨는 만나는 일도 그와 같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다.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활약이다. 그는 1964년 세계선수권대회 월드베스트5’에 선정된 이후 현역 은퇴를 고려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1967년 체코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고 자신은 대회 최우수선수(MVP)에 올랐다.

     

    또한 같은 1967년 그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한국팀을 이끌며 사상 첫 금메달 획득이라는 성과를 올렸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존재 자체가 세계인들에게 희미하던 1960년대 농구로 세계에 한국을 알린 한국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였다.

     

    그가 은퇴경기를 펼친 1967 11 2일 장충체육관에는 무려 7천여 명의 관중들이 운집했다고 한다.



     

    현역 은퇴 이후 박신자 씨는 농구대잔치시절인 1982년 신용보증기금 여자농구단의 사령탑에 오르며 한국 스포츠 역사상 첫 여성 실업팀 감독이 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농구담당관으로 일했다.

     

    그리고 현역에서 은퇴한 지 32년 만인 1999년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세계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예를 안았다.

     

    현재 박신자 씨의 나이는 74.

     

    자신의 이름을 딴 농구대회 개막식에 후배 선수들이 도열한 가운데 그들과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경기장에 들어서는 박신자 씨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젊고 건강했다.



     

    그리고 개막전 직후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그는 몸뿐만 아니라 목소리와 눈빛, 그리고 정신까지 좌중을 압도할 만큼 카리스마 넘치고 건강미가 넘쳤다. 온화한 미소와 깔끔하게 정돈된 목소리 속에 결코 한 마디도 그냥 흘려 들을 수 없는 내용의 메시지가 담겨 있어 그야말로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우선 자신의 이름을 딴 대회 개막식에 참석하게 된 소감을 묻는 질문에 박신자 씨는 당연히 기쁘다. 어떤 운동선수도 같을 거라 생각한다특히 살아 있는 동안 선수의 이름을 딴 대회를 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보너스와도 같다고 전했다.

     

    이어 이날 개막전에서 후배들이 뛰는 모습을 본 소감을 묻자 그는 국제대회에서 순위에 들 만큼의 실력이나 능력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빨리 움직이는 모습은 좋았다. 체력과 기술을 연마한다면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손녀와도 같은 어린 후배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면서도 선배로서 엄격한 지적이 담긴 한마디였다.

     

    최근 여자프로농구에 대해서도 그는 “(각 팀에서)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선수들을 키플레이어로 기용하더라그렇게 하면 한국에서는 성적을 낼 수 있겠지만 국제대회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현재 여자프로농구 6개 구단 지도자들이 들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쉽사리 그 자리에 서 있기 불편했을 것이다. 그 만큼 아픈 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단순히 지도자들을 질타하고자 한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단기간의 성적만을 가지고 감독의 생사여부를 결정하는 구단들에 대한 메시지로 보였다.



     

    왜냐하면 그도 신용보증기금 감독 시절 화려한 선수 생활 때와는 달리 연전 연패를 거듭한 끝에 쓸쓸히 지휘봉을 내려놓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드래프트에서 떨어진 선수들을 모아 창단했던 신용보증기금의 감독으로서 제대로 된 구단의 지원 없이 팀을 꾸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해 본 이가 바로 박신자 씨다.

     

    때문에 팀을 리빌딩하고 젊고 건강한 팀을 만드는 것이 장기적으로 팀에게도 좋지만 한국여자농구 전체를 놓고 볼 때도 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한 마디 말로 정리한 셈이다.

     

    박신자 씨는 이날 한국여자농구가 국제무대에서 다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필요한 요소에 대해 한 마디로 저변확대라고 잘라 말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넓고 두터운 저변에서 좋은 선수가 나온다는 것.

     

    그는 "나도 농구협회에서 1990년대까지 일을 할 때 생각이 있었지만 쉽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내 이름을 딴 대회를 통해 저변이 확대될 수 있다면 정말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

     

    박신자 씨는 기자회견 가운데 선수들의 노력을 강조했다. 체력을 키우고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는 것.

     

    그는 슛만 잘하는 선수가 자기 자리에서 득점만 잘 올리는 것은 농구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며 득점을 많이 하고 스타 플레이어로서 인기를 얻는 것보다 어시스트와 타이밍에 맞춰 리바운드를 걷어내는 능력, 수비, 페이크 플레이 등 모든 농구기술에 능한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후배 중 눈에 띄었던 후배로 전주원(현 춘천 우리은행 코치) 코치를 꼽았다. 박정은(현 용인삼성 코치) 코치의 경우 특별관계(박신자 씨의 조카)를 감안 이름을 올리지는 않겠다고 말했지만 박정은 코치도 꼽고 싶은 이름 중 하나라는 속내를 드러낸 셈이다.

     

    박신자 씨는 선수시절 왼손 훅슛이 좋은 팀 동료가 있다면 그 동료 뒤에서 항상 동료의 슛폼을 따라하며 부단히 연습했고, 스피드가 좋은 동료와는 코트를 함께 런닝 패스 연습을 하며 스피드를 키웠다고 한다. 또 슛이 좋은 동료가 하루에 500개의 슈팅 연습을 하면 자신은 600개씩 슈팅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을 감수했던 단 하나의 이유는 그저 농구가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

     

    전설은 전설의 주인공이 실제로 현세에 존재하지 않아야 더 신비로울 수 있다. 하지만 전설의 주인공이 살아 숨쉬는 가운데 주인공의 입으로 직접 듣는 전설의 생명력은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날 박신자 씨는 한국 여자농구의 살아있는 전설로서, 그리고 농구계 원로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반응형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