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스위스 월드컵부터 1990년대 까지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는 곧 골키퍼들의 수난사라고 표현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 가운데서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였던 최인영(현 전북현대 코치)은 가장 잔인한 월드컵의 추억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한국 프로축구의 초창기 신생팀 현대의 창단 멤버로 합류하는 순간부터 조병득, 오연교 등과 함께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골키퍼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선수로 인정받았다.
최인영은 초등학교 시절 배구 선수로 활약했던 덕분에 순발력과 점프력이 뛰어난데다 캐칭 능력 역시 탁월했던 탓에 공중볼 처리에 강했고, 손을 이용한 수비 뿐 아니라 발을 이용한 수비에도 능했다. 두둑한 배짱 역시 최인영의 강점이었다.
그는 1984년 현대 입단 당시 22살의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한국 축구의 대표 골키퍼 김황호를 제치고 주전자리를 꿰찼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승승장구 하며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출전이 유력시됐다.
물론 최인영이 그 자리에 까지 오른 것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서울체고 시절부터 유망주로 주목 받았고, 1981년 호주 멜버른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에 주전 골키퍼로 참가하면서부터 대중들에게도 이름을 알렸을 만큼 엘리트 코스를 밟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오던 최인영은 그러나 꿈에 그리던 월드컵 무대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불의의 부상으로 월드컵 출전의 꿈을 4년 뒤로 미뤄야 했다.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주전으로 뛰며 한국의 32년만의 월드컵 본선행을 이끌었지만 한국이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 지었던 일본과의 마지막 홈경기를 앞두고 최인영은 부상을 당했고, 김정남 감독이 이끌던 당시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서 끝내 제외되고 만 것이다.
이후 최인영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당당히 입성했다. 당시 대표팀 엔트리에는 1983년 멕시코청소년축구 4강의 주역인 김풍주와 국내 프로축구 무대에서 동물적인 반사신경과 순발력을 자랑하던 정기동이 함께 포함됐지만 주전은 최인영이었다.
당시 이회택 감독이 이끌던 한국 대표팀은 최순호, 김주성, 황보관, 황선홍 등 신구 조화가 잘 이루어진 선수들을 앞세워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9승2무라는 무패의 성적으로 일찌감치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 지었다.
한국의 그와 같은 거침없는 무패 행진의 중심엔 당연히 골키퍼 최인영이 버티고 있었다.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한국 축구의 가능성을 확인했던 국내외 언론들은 한국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아시아 돌풍을 이끌 주역으로 소개하며 크나큰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기대감이 실망감과 허탈감으로 바뀌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0년 6월 12일 이탈리아 베로나의 벤테고디 스타디움에서 열린 E조 예선 첫 경기에서 한국은 1986년 멕시코 대회 4강에 빛나는 유럽의 강호 벨기에와 만났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월등한 체격과 체력, 그리고 한 차원 높은 기술을 지닌 벨기에 선수들에게 한국이 자랑하던 미드필드진과 수비진은 속절없이 밀렸고, 번번이 실점 기회를 맞았다.
그러는 가운데 약관의 대학생이었던 홍명보가 고군분투 하고 있었고, 특히 최인영이 전반전에만7-8 차례의 눈부신 선방을 펼쳐 한국이 전반전을 0-0으로 마칠 수 있도록 이끌었다.
하지만 그렇게 버티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후반 7분 한국은 벨기에의 그리세에게 선제골을 내줬다. 그때까지 너무나 좋은 수비를 펼치던 최인영이 어설픈 전진 수비를 펼치다 그리세의 재치있는 로빙 슈팅에 허무하게 골을 내준 상황이었다. 이후 더욱 더 거세진 벨기에의 파상공세에 한국은 그야말로 철저히 유린당했고, 선제골을 내준지 11분만에 벨기에의 드 월프가 최인영이 지키고 있던 골문에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슈팅을 날려 쐐기골을 뽑아냄으로써 한국은 추격의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물론 두 번째 골을 성공시킨 이후에도 벨기에의 선수들은 다득점을 위해 거세게 한국 문전을 위협했지만 최인영의 선방에 막혀 더 이상의 득점을 올리는 데는 실패했다. 최인영이 아니었다면 5-0으로 패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경기였다.
이후 최인영은 혼신의 힘을 다해 선방을 펼쳤지만 한국은 '무적함대' 스페인에 1-3,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에 0-1로 패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한국이 거둔 성적은 3전 전패에 득점이라고는 스페인전에서 황보관이 기록한 한 골이 전부였다.

이탈리아 월드컵이 끝나고 한국의 최악의 졸전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지만 이탈리아 대회에서 유럽과 남미의 강호들을 상대로 한 세 차례 경기에서 6실점으로 선방, 한국 축구의 체면을 살려준 최인영에게 만큼은 큰 비판이 가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4년 후 월드컵에서는 더욱 더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시하는 여론이 높았다.
하지만 최인영이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한 모든 한국 선수들 가운데 가장 잘한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을 지라도 벨기에전에서 범한 단 한 차례의 실수가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너무나 강렬하게 박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28살에 도전했던 두 번째 월드컵이자 생애 첫 번째 본선 무대에서 그토록 쓰라린 추억을 안은 최인영은 그러나 다시 4년간 칼을 갈았다.
그리고 1994년 미국 월드컵에 그는 주장으로 참가했다. 비록 소속팀에서는 김병지에 밀려 주전 자리를 내준 상황이었지만 당시 월드컵 대표팀의 김호 감독은 최인영을 대표팀에 발탁했고, 주장의 중책까지 맡겼다.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축적한 경험을 높이 산 셈이다.
그런데 드라마틱 하게도 미국 월드컵에서 최인영의 첫 상대는 이탈리아 대회에서 세 골이나 먹었던 스페인이었다.
하지만 김호 감독이 이끌던 한국 대표팀은 전반전부터 조직력 면에서 스페인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여러 차례 골 기회를 만들어 내는 등 선전을 펼쳤고, 먼저 두 골을 내주기는 했지만 최인영과 함께 4년간 칼을 갈아온 홍명보와 '날쌘돌이' 서정원의 연속골에 힘입어 2-2 무승부 경기를 이끌어 냈다.
세계 최강 전력의 스페인 대표팀을 상대로 승점을 따냈다는 것은 세계를 놀래킬 일이었다. 그 중심에 역시 최인영이 있었고, 최인영 개인적으로는 4년전 당한 패배의 아픔을 어느 정도는 설욕했다고 알 수 있는 경기였다.
다음 경기는 한국이 16강행을 위해 꼭 이겨야 하는 볼리비아와의 경기였다. 최인영으로서는 당연히 무실점으로 막아내야 하는 경기였다. 그리고 최인영은 무실점 수비를 펼쳤다. 하지만 축구에서 골키퍼는 맡겨진 본연의 역할을 아무리 잘해도 무승부 이상을 만들어 낼 수 없는 포지션이었다.
최인영이 무실점 경기를 펼쳤지만 반대로 한국의 공격진은 무득점 경기를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볼리비아와 0-0으로 비겼다.
여기까지 한국은 무패였다. 독일을 반드시 이겨야 16강에 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당시 대회가 열리던 미국 현지 날씨가 연일 폭염에 가까운 더운 날씨가 거듭되고 있었던 탓에 노쇠한 독일 선수들을 상대로 전반전을 잘 버텨내면 후반전에 충분히 승부를 걸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축구팬들은 또 다시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말았다. 최인영이 전반전에만 독일에 무려 세 골을 허용한 것이다.
첫 번째 골이 클린스만 개인의 작품이었다면 독일의 슈팅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오자 이를 재차 한국의 골문에 차 넣어 만들어 낸 독일의 두 번째 골은 한국의 불운이었다. 하지만 클린스만이 터뜨린 독일의 세 번째 골은 최인영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였던 탓에 축구팬들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결국 최인영은 후반전에 나오지 못했다. 최인영을 대신해 한국의 골문을 지킨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운재였다. 당시 경희대 재학중인 21살의 어린 골키퍼였던 이운재는 후반전 45분을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그러는 사이 한국은 황성홍과 홍명보의 연속골이 터지며 독일을 무섭게 몰아붙였지만 끝내 경기결과를 뒤바꿔 놓지는 못했다.
경기결과는 2-3 독일의 승리였고, 한국은 16강 진출에 또 다시 실패했다. 승부가 한 골 차로 갈렸다는 점에서 최인영이 클린스만에게 내준 세 번째 골이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았다.
경기 직후 최인영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독일전에서 먹은 세 골은 평생 나를 쫓아다니며 괴롭힐 것"이라는 말과 함께 대표팀을 사퇴했다.
그렇게 199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던 골키퍼 최인영의 월드컵 도전은 막을 내렸다.
두 차례 참가한 월드컵을 통해 최인영은 단 한 번도 승리를 따내지도 못했고 기쁨과 영광의 기억보다는 아픔과 좌절의 기억이 더 많다. 하지만 최인영에게 두 차례 월드컵은 그렇게 잔인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최인영에게 골키퍼로서 누구에게 내놓아도 자랑스러울 만한 훈장이자 타이틀을 안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최인영이 월드컵에서 전후반 90분 풀타임을 뛰며 무실점 경기(1994년 미국월드컵 볼리비아전)를 펼친 최초의 한국인 골키퍼라는 사실이다.
한국이 지난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7회 출전한 기록을 모두 통틀어 월드컵에서 풀타임 무실점 경기를 경험한 골키퍼는 최인영과 이운재 두 명 뿐이다.
아직도 축구팬들은 최인영이 두 차례 월드컵에서 범한 두 차례의 결정적 실수에 대해 기억을 떠올리고 아쉬움을 드러내지만 이와 같은 사실은 모르고 있는 듯 하다.
지금이라도 최인영이 월드컵에서 보여준 횟수를 헤아리기도 힘든 무수한 선방의 장면과 한국인 골키퍼로는 최초로 월드컵 경기에서 풀타임 무실점을 기록한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봄이 어떨까?
이 포스트는 <다음스포츠> 남아공 월드컵 특집 매거진 'THE REDS'에 정식 기사로 게재된 포스트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였던 최인영(현 전북현대 코치)은 가장 잔인한 월드컵의 추억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한국 프로축구의 초창기 신생팀 현대의 창단 멤버로 합류하는 순간부터 조병득, 오연교 등과 함께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골키퍼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선수로 인정받았다.
최인영은 초등학교 시절 배구 선수로 활약했던 덕분에 순발력과 점프력이 뛰어난데다 캐칭 능력 역시 탁월했던 탓에 공중볼 처리에 강했고, 손을 이용한 수비 뿐 아니라 발을 이용한 수비에도 능했다. 두둑한 배짱 역시 최인영의 강점이었다.
그는 1984년 현대 입단 당시 22살의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한국 축구의 대표 골키퍼 김황호를 제치고 주전자리를 꿰찼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승승장구 하며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출전이 유력시됐다.
물론 최인영이 그 자리에 까지 오른 것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서울체고 시절부터 유망주로 주목 받았고, 1981년 호주 멜버른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에 주전 골키퍼로 참가하면서부터 대중들에게도 이름을 알렸을 만큼 엘리트 코스를 밟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오던 최인영은 그러나 꿈에 그리던 월드컵 무대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불의의 부상으로 월드컵 출전의 꿈을 4년 뒤로 미뤄야 했다.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주전으로 뛰며 한국의 32년만의 월드컵 본선행을 이끌었지만 한국이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 지었던 일본과의 마지막 홈경기를 앞두고 최인영은 부상을 당했고, 김정남 감독이 이끌던 당시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서 끝내 제외되고 만 것이다.
이후 최인영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당당히 입성했다. 당시 대표팀 엔트리에는 1983년 멕시코청소년축구 4강의 주역인 김풍주와 국내 프로축구 무대에서 동물적인 반사신경과 순발력을 자랑하던 정기동이 함께 포함됐지만 주전은 최인영이었다.
당시 이회택 감독이 이끌던 한국 대표팀은 최순호, 김주성, 황보관, 황선홍 등 신구 조화가 잘 이루어진 선수들을 앞세워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9승2무라는 무패의 성적으로 일찌감치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 지었다.
한국의 그와 같은 거침없는 무패 행진의 중심엔 당연히 골키퍼 최인영이 버티고 있었다.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한국 축구의 가능성을 확인했던 국내외 언론들은 한국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아시아 돌풍을 이끌 주역으로 소개하며 크나큰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기대감이 실망감과 허탈감으로 바뀌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0년 6월 12일 이탈리아 베로나의 벤테고디 스타디움에서 열린 E조 예선 첫 경기에서 한국은 1986년 멕시코 대회 4강에 빛나는 유럽의 강호 벨기에와 만났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월등한 체격과 체력, 그리고 한 차원 높은 기술을 지닌 벨기에 선수들에게 한국이 자랑하던 미드필드진과 수비진은 속절없이 밀렸고, 번번이 실점 기회를 맞았다.
그러는 가운데 약관의 대학생이었던 홍명보가 고군분투 하고 있었고, 특히 최인영이 전반전에만7-8 차례의 눈부신 선방을 펼쳐 한국이 전반전을 0-0으로 마칠 수 있도록 이끌었다.
하지만 그렇게 버티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후반 7분 한국은 벨기에의 그리세에게 선제골을 내줬다. 그때까지 너무나 좋은 수비를 펼치던 최인영이 어설픈 전진 수비를 펼치다 그리세의 재치있는 로빙 슈팅에 허무하게 골을 내준 상황이었다. 이후 더욱 더 거세진 벨기에의 파상공세에 한국은 그야말로 철저히 유린당했고, 선제골을 내준지 11분만에 벨기에의 드 월프가 최인영이 지키고 있던 골문에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슈팅을 날려 쐐기골을 뽑아냄으로써 한국은 추격의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물론 두 번째 골을 성공시킨 이후에도 벨기에의 선수들은 다득점을 위해 거세게 한국 문전을 위협했지만 최인영의 선방에 막혀 더 이상의 득점을 올리는 데는 실패했다. 최인영이 아니었다면 5-0으로 패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경기였다.
이후 최인영은 혼신의 힘을 다해 선방을 펼쳤지만 한국은 '무적함대' 스페인에 1-3,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에 0-1로 패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한국이 거둔 성적은 3전 전패에 득점이라고는 스페인전에서 황보관이 기록한 한 골이 전부였다.
이탈리아 월드컵이 끝나고 한국의 최악의 졸전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지만 이탈리아 대회에서 유럽과 남미의 강호들을 상대로 한 세 차례 경기에서 6실점으로 선방, 한국 축구의 체면을 살려준 최인영에게 만큼은 큰 비판이 가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4년 후 월드컵에서는 더욱 더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시하는 여론이 높았다.
하지만 최인영이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한 모든 한국 선수들 가운데 가장 잘한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을 지라도 벨기에전에서 범한 단 한 차례의 실수가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너무나 강렬하게 박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28살에 도전했던 두 번째 월드컵이자 생애 첫 번째 본선 무대에서 그토록 쓰라린 추억을 안은 최인영은 그러나 다시 4년간 칼을 갈았다.
그리고 1994년 미국 월드컵에 그는 주장으로 참가했다. 비록 소속팀에서는 김병지에 밀려 주전 자리를 내준 상황이었지만 당시 월드컵 대표팀의 김호 감독은 최인영을 대표팀에 발탁했고, 주장의 중책까지 맡겼다.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축적한 경험을 높이 산 셈이다.
그런데 드라마틱 하게도 미국 월드컵에서 최인영의 첫 상대는 이탈리아 대회에서 세 골이나 먹었던 스페인이었다.
하지만 김호 감독이 이끌던 한국 대표팀은 전반전부터 조직력 면에서 스페인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여러 차례 골 기회를 만들어 내는 등 선전을 펼쳤고, 먼저 두 골을 내주기는 했지만 최인영과 함께 4년간 칼을 갈아온 홍명보와 '날쌘돌이' 서정원의 연속골에 힘입어 2-2 무승부 경기를 이끌어 냈다.
세계 최강 전력의 스페인 대표팀을 상대로 승점을 따냈다는 것은 세계를 놀래킬 일이었다. 그 중심에 역시 최인영이 있었고, 최인영 개인적으로는 4년전 당한 패배의 아픔을 어느 정도는 설욕했다고 알 수 있는 경기였다.
다음 경기는 한국이 16강행을 위해 꼭 이겨야 하는 볼리비아와의 경기였다. 최인영으로서는 당연히 무실점으로 막아내야 하는 경기였다. 그리고 최인영은 무실점 수비를 펼쳤다. 하지만 축구에서 골키퍼는 맡겨진 본연의 역할을 아무리 잘해도 무승부 이상을 만들어 낼 수 없는 포지션이었다.
최인영이 무실점 경기를 펼쳤지만 반대로 한국의 공격진은 무득점 경기를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볼리비아와 0-0으로 비겼다.
여기까지 한국은 무패였다. 독일을 반드시 이겨야 16강에 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당시 대회가 열리던 미국 현지 날씨가 연일 폭염에 가까운 더운 날씨가 거듭되고 있었던 탓에 노쇠한 독일 선수들을 상대로 전반전을 잘 버텨내면 후반전에 충분히 승부를 걸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축구팬들은 또 다시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말았다. 최인영이 전반전에만 독일에 무려 세 골을 허용한 것이다.
첫 번째 골이 클린스만 개인의 작품이었다면 독일의 슈팅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오자 이를 재차 한국의 골문에 차 넣어 만들어 낸 독일의 두 번째 골은 한국의 불운이었다. 하지만 클린스만이 터뜨린 독일의 세 번째 골은 최인영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였던 탓에 축구팬들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결국 최인영은 후반전에 나오지 못했다. 최인영을 대신해 한국의 골문을 지킨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운재였다. 당시 경희대 재학중인 21살의 어린 골키퍼였던 이운재는 후반전 45분을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그러는 사이 한국은 황성홍과 홍명보의 연속골이 터지며 독일을 무섭게 몰아붙였지만 끝내 경기결과를 뒤바꿔 놓지는 못했다.
경기결과는 2-3 독일의 승리였고, 한국은 16강 진출에 또 다시 실패했다. 승부가 한 골 차로 갈렸다는 점에서 최인영이 클린스만에게 내준 세 번째 골이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았다.
경기 직후 최인영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독일전에서 먹은 세 골은 평생 나를 쫓아다니며 괴롭힐 것"이라는 말과 함께 대표팀을 사퇴했다.
그렇게 199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던 골키퍼 최인영의 월드컵 도전은 막을 내렸다.
두 차례 참가한 월드컵을 통해 최인영은 단 한 번도 승리를 따내지도 못했고 기쁨과 영광의 기억보다는 아픔과 좌절의 기억이 더 많다. 하지만 최인영에게 두 차례 월드컵은 그렇게 잔인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최인영에게 골키퍼로서 누구에게 내놓아도 자랑스러울 만한 훈장이자 타이틀을 안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최인영이 월드컵에서 전후반 90분 풀타임을 뛰며 무실점 경기(1994년 미국월드컵 볼리비아전)를 펼친 최초의 한국인 골키퍼라는 사실이다.
한국이 지난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7회 출전한 기록을 모두 통틀어 월드컵에서 풀타임 무실점 경기를 경험한 골키퍼는 최인영과 이운재 두 명 뿐이다.
아직도 축구팬들은 최인영이 두 차례 월드컵에서 범한 두 차례의 결정적 실수에 대해 기억을 떠올리고 아쉬움을 드러내지만 이와 같은 사실은 모르고 있는 듯 하다.
지금이라도 최인영이 월드컵에서 보여준 횟수를 헤아리기도 힘든 무수한 선방의 장면과 한국인 골키퍼로는 최초로 월드컵 경기에서 풀타임 무실점을 기록한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봄이 어떨까?
이 포스트는 <다음스포츠> 남아공 월드컵 특집 매거진 'THE REDS'에 정식 기사로 게재된 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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